사임당 신씨(1504년 12월 5일 ~ 1551년 6월 20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며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된다.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되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된다.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다.친정어머니 이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다.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다.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의 원조를 받아 한성의 본가에서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 해에 몇 번 처가를 들르는 생활을 계속하였다.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편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계속했다.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시에 그쳤고, 기묘사화로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산 사임당의 어머니는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고 소신있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씨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다.유교적인 규범을 내세웠던 조선 왕조 환경에서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모든 재능을 묻어야만 했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대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기녀임을 보면, 일반 가정의 부인이 집안 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이런 사회적 제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들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임당이 예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가지 환경이 크게 좌우했다.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아버지 신명화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그러나 이원수는 한편으로는 부인인 사임당을 어느정도 멀리하게 된다.친정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사임당은 38세에 한성부에 새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씨와 함께 살았다. 홍씨 부인 역시 연로하여 살림을 모두 며느리에게 맡기고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다.그녀는 오랫동안 친정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건강의 악화와 함께 남편의 축첩,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다.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재능 있는 여성이었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을 쓸 정도였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 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또한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이원수가 세도가인 의정부 영의정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기는 이원수의 5촌 당숙(사임당의 시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이었는데, 명종 초기에 소윤의 영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인물이었다.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1550년 가슴 통증을 앓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다. 병은 심장병이었다.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정성 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이 형제의 병구완에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신사임당은 죽기 직전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씨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은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그가 죽자마자 첩인 권씨를 본댁으로 들여오고, 아들 이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자리도(紫鯉圖), 노안도(蘆雁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적이며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1551년 5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 중이던 남편 이원수는 세곡 운반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파견되어 갔다.1551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이이(李珥)도 함께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 보냈다. 전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울면서 편지를 썼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임무를 마치고 자식들과 함께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임당이 편지를 보낸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 일 후에는 위독해졌다. 그리고 병상에 둘러 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신사임당은 5월 14일경 병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7일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향년 48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한다.그의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이이가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하였다.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 안장하였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다. 후에 이이가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까지 승진하여, 정경부인(정1품)에 추증하였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또한 그녀의 친정 조카인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선조이다.
50000원 지폐에 도안된 신사임당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아들인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신사임당 역시 다시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현창하고, 국사와 국어 교과서, 미술 교과서에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전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7년 대한민국 여성계의 집단 반발이 거셌으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50,000원 지폐 주인공으로 도안하였다.2007년 11월 한국은행에 의해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며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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